저녁 밥상머리였다. 며느리가 아이 재우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문득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라." 삼십 년 넘게 아이를 키운 경험이 확신처럼 등을 떠밀었다. 다행히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국그릇을 한 번 더 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하지 않은 말이 그날 저녁의 평화를 지켜준 것이었다.
다윗은 이런 순간을 알았던 사람이다. 그는 기도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스스로 입을 다스릴 자신이 없어서, 대신 문지기를 세워달라고 청한 것이다.
입은 늘 열려 있다
집에는 대문이 있고, 대문에는 문지기나 자물쇠가 있다.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들일 것과 들이지 말 것을 가려주는 장치다. 그런데 입에는 그런 장치가 원래 없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그대로 흘러나가기 쉬운 구조다. 다윗 이 굳이 파수꾼과 문지기라는 두 단어를 겹쳐 쓴 것은, 그만큼 입이라는 문이 지키기 어려운 자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을 때는 말을 아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확신이 부족했고, 남 앞에서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상황이 거꾸로 된다. 살아본 세월만큼 아는 것도 많아지고, 그 앎이 곧잘 "내가 옳다"는 확신으로 굳는다. 입을 지키는 문이 오히려 헐거워지는 시기가, 다름 아닌 지금 이 나이인지도 모른다.
참견과 조언 사이
자식의 살림을 볼 때, 후배의 판단을 들을 때, 옛 친구의 선택을 전해 들을 때 — 마음속에서는 늘 두 개의 말이 경쟁한다. 하나는 진심으로 걱정해서 나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옳다는 걸 확인 받고 싶어서 나오는 말이다. 문제는 이 둘이 겉모습이 거의 똑같다는 것이다. 둘 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로 시작한다.
다윗이 파수꾼을 청한 이유도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는 자기 판단 만으로는 이 둘을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 전, 잠시 세워두고 물어볼 문지기가 필요했다. 지금 이 말은 그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침묵이 관계를 지킨 순간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에는 하지 않은 말이 지켜준 관계들이 있다. 며느리에게 삼키고 만 잔소리, 다 큰 자식의 선택 앞에서 참아낸 훈계, 오랜 친구의 실수를 알고도 굳이 꺼내지 않은 이야기. 그런 침묵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기억하기 어렵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관계를 지켜낸 조용한 공로였다.
반대로 뱉고 나서 오래 후회한 말도 있을 것이다. 순간의 확신으로 던진 한마디가, 몇 년이 지나도록 상대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 번 보았다. 말은 이미 나가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문을 지키는 일이 문을 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다.
오늘의 적용
거창한 결심이 아니어도 된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곧바로 뱉지 않고 숨 한 번을 먼저 쉬어보는 것. 그 짧은 틈이 바로 다윗이 청했던 문지기의 자리일 수 있다. 국 그릇을 한 번 더 젓거나, 찻잔을 한 모금 마시거나 — 몸에 익은 작은 동작 하나를 나만의 문지기로 정해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생각해볼 질문
1. 요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행히 삼킨 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2. 뱉고 나서 오래 후회로 남은 말이 있다면, 그때 내 마음은 무엇을 확인 받고 싶었던 걸까요?
3. 나만의 '문지기' 로 삼을 수 있는 작은 습관 하나를 정한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